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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01-프롤로그(로미오와 줄리엣)_06 [0] | 배일도

번호 280 | 09.03.16
조회 291 | 추천추천 1

"진철 군, 놀랄 것 없네. 내가 설명하지."

마침, 그때 회장이 나서지 않았더라면 진철은 정말로 유성을 들쳐업고 응급실로 뛰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교수님, 수고하셨습니다. 운전기사한테 댁까지 모셔다드리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치의는 잠시 진철을 빤히 쳐다본 뒤 밖으로 나갔다.

"진철 군."

"예, 회장님."

"혹시 유성이한테서 뭔가 이상한 느낌 안 들던가?"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말투였다.

"예, 뭔가..말로는 좀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진철이 회장에게 들은 말은 경악할 만한 수준의 얘기였다.

...

...

...

"자네, 좀비영화 본 적 있나?"

"예? 아, 로메로 감독 영화는 빼놓지 않고 다 봤습니다만..?"

"좀비든 뭐든간에, 사실을 왜곡하는 영화가 한둘이 아니라네. 자넨 좀비가 뭐라고 생각하나?"

"한 마디로, 느릿느릿 걸어다니는 시체 아닙니까? 오로지 사냥만을 위해 움직이는.."

"그건 단지 상상일 뿐이야."

...

...

...

"다음 뉴스입니다. 오늘 오전 12시경, 대치동 주택가 인근의 교회 지하실에서 가스폭발사고가 일어나 주민 수백가구가 대피하는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발생하지 않은 상태이며, 교회 건물 전체가 소실됨에 따라 사고 원인을 정확히 밝히는 데는 다소 시일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권주하 기자입니다."

...

...

...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네."

대윤은 얘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유성이가 고등학교에 들어간 지 얼마 안되었을 때의 일이네. 하루는 녀석이 여자친구가 생겼다고 자랑을 하더군. 어린 놈이 벌써부터 연애질이라니..난 혼쭐을 내줄까도 생각했지만 결국엔 그냥 넘어갔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대윤은 답답한 듯 줄담배를 뻑뻑 피워댔다.

"불미스런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진철이 물었다.

"여름방학이 되자, 녀석은 자기 여자친구와 함께 전국일주를 하게 해달라고 날 조르더군. 난 조건을 내걸었지. 다음 학기에 학년 전체에서 10등 안에 들 자신 있으면 갔다오라고.."

대윤은 그답지 않게 뜸을 들이고 있었다.

"녀석이 여행을 떠난 지 3일째 되는 날 밤에, 전화가 한통 걸려왔네. 전남 광양이었던가? 경찰이 하는 말이, 유성이가 여자친구를 보호하려다 동네 양아치들과 시비가 붙었다고 했었네. 전화를 끊자마자 밤새도록 달려 경찰서에 도착했지. 거기 있는 형사들은 하나같이 믿을 수 없다는 투로 얘기하더군. 어떻게 고등학생 한 명이 깡패 수십명을 뭉개버릴 수가 있냐고 말일세."

"정당방위였습니까?"

"불행히도, 그중 하나가 죽었네. 유성인 소년원 신세가 되었고, 군인의 꿈은 접어야만 했지."

"여자친구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아인 그날 이후 가출했다고 하더군. 유성이 부탁으로 내가 전국을 수소문했지만 행방을 알 길이 없었네. 중요한 건 그게 아냐. 그때의 양아치 하나가 날 찾아왔었네. 자기가 유성이의 비밀을 알고 있다고 얘기하더군."

"협박이었습니까?"

"그렇지. 난 화를 겨우 눌러 참고 그놈의 얘기를 들었지. 눈에서 빛이 났다는둥, 주먹으로 치니 상대가 저만치 나가 떨어지더라는둥, 마치 무협지 주인공같은 얘기를 나열하더군. 남들이 들으면 허무맹랑한 얘기를 하는 걸로 여겼겠지만, 난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다네. 엄연히 사실이었으니까."

"결론은..그 친구가 좀비라는 얘깁니까? 전 전혀 납득이 가질 않습니다."

"자네, 유성이가 벗은 모습을 한번이라도 본 적 있나?"

"아뇨, 전혀.."

"봤다면 자네도 믿지 않고는 못 배길 걸세. 한날 한시에, 그렇게까지 자상(刺傷)을 많이 입고도 살아날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말야."

...

...

...

-1988.1.31, 한남동-

"회장님, 저 왔습니다."

인터폰을 통해 진철의 목소리가 가정부에게로 전달되었다.

"덜컹!"

문이 열리고, 진철은 동행인과 함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괜히 떨리네. 나 어때? 괜찮아?"

"제법 신경쓴 티가 나네."

진철은 웃으면서 얘기했다. 동행인은 다름아닌 영신이었다.

...

...

...

"제 약혼녀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유영신이라고 합니다."

진철은 영신을 거실 안의 사람들에게 소개했다. 거실에는 회장 말고도 진철의 동료들 전부가 와 있었다. 그중 한 명은 영신과 구면이었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영신 또한 마찬가지였다.

...

...

...

분위기가 무르익자, 진철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슬슬 다음 타겟을 정할 때가 온 것 같은데, 난 도영파로 했으면 하는데..니들 생각은 어떠냐?"

"대형, 손님도 계신데.."

블랙 나이트의 막내, 신영주와 진철의 시선이 마주쳤다. 영주는 영신을 흘깃 쳐다보았다. 외부인 앞에서 해야 할 얘기가 아니지 않느냐는 의미였다.

그러자, 침묵을 지키고 있던 상택이 한 마디 했다.

"영주야, 걱정 마라. 진철 형님, 이젠 밝힐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진철은 잠깐 영신을 바라보았다. 영신은 그저 웃고만 있었다.

"그럼 말하지. 이제까지..비서실장과 우릴 연결해준 사람은 바로 여기있는 내 약혼녀야."

동료들의 표정은 별로 좋아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번 일로 인해 '연락책'에 대해 감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회장이 상황을 대신 수습했다.

"상택 군, 재필 군, 그리고..영주 양."

"예, 회장님."

"그런 사소한 일로 얼굴을 붉혀서야 쓰겠습니까? 더구나 형수님이 되실 분인데 말이오."

"죄송합니다, 형수님. 저희가 경솔했습니다."

상택이 대신 사과했다.

...

...

...

-1988.1.31, 압구정동-

"도영파가 누구야?"

"뭐?"

"궁금해서 그래."

난데없는 호기심이라니..진철은 기껏 공들인 로맨틱 무드가 산산이 부서지는 느낌이 들었다.

"좋게 말하자면..사창가의 대부라고나 할까?"

"그다지 좋은 표현도 아니네, 뭘. 근데 왜 그런 별명이 붙었대?"

"영등포를 휘어잡고 있거든. 빠져나갈 구멍이 하도 많아서 경찰도 속수무책이야."

"그런 사람 상대해도 괜찮겠어?"

진철은 영신을 잠시 쏘아보았다.

"내가 그렇게 약하게 보여?!"

진철이 영신의 옆구리를 마구 간질이며 말하자, 영신은 간지러워 죽겠다며 이리저리 뒹굴었다. 그 바람에 벽에 걸려있던 달력이 바닥에 떨어졌다. 달력의 1월 마지막 날 아래쪽에는 조그맣게 'D-95'라고 빨간 펜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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